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누스 1세 (문단 편집) == 평가 == [[파일:이탈리아 콘스탄티누스.jpg]] [[포로 로마노]]의 입구에 남아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후일 파리 [[에투알 개선문]]의 모델로 차용된다. '''서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또 학계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황제다.''' 최초로 대제([[라틴어]]: 마그(막)누스, Magnus/ [[그리스어]]: 메가스, Μέγας) 칭호를 받은 황제기도 하며, 이는 [[기독교]]를 양지로 이끈 것도 이유지만 그 전에 확립한 이런저런 획기적인 업적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제시한 기독교 제국으로의 길이 이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원수정기의 황제들을 능가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체제 개편 작업을 완성했고, 사회 다방면에서 개혁을 주도했으며, [[이스탄불|비잔티움]]으로의 행정수도 이전을 단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제국의 역사를 천 년이나 연장시켰다. 종교 관용정책을 등에 업고 대제가 된 것만은 아니며, 설령 그렇지 않았어도 그가 제국에 끼친 거대한 영향을 고려하면 대제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어 위키백과에도 리다이렉트가 아니라 표제어 자체에 'the Great'가 붙은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부터 콘스탄티누스 11세까지의 제국사 1480년을 통틀어 그뿐이다. 일단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후대 동로마 제국의 기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인두세와 토지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과 초기 형태의 관료제는 이후 동로마 제국은 물론 [[압바스 왕조]]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물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세제 개혁, 체제 개혁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 기독교 공인보다 일반인에게 비칠 쇼맨십이나 상징성이 덜해보이는 것, 겨우 그뿐인 것이다.]을 다진 황제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막장으로 치닫던 사두정치를 끝낸 것은 물론이고, 로마를 [[중흥|다시 내부적으로 안정을 꾀해서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내정이 혼란스러울 때면 안정시키고 다시 재기할 가능성만으로 갖춘 것만으로도 대단한 평가를 받는다.[* 당장 한국사의 고구려의 [[소수림왕]]을 생각해보면 백제와 후연에게 두들겨 맞아 산골짜기 나라로 전락했는데 내정을 안정시키고 재기할 가능성을 마련해 놓았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내정을 훌륭히 안정시킨 후에 여러 개혁에 성공한 왕은 그만큼 리더쉽과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마 제국에서 점점 중요성이 떨어져가던 이탈리아 반도를 제껴버리고 동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요충지의 도시 비잔티움을 새로 수도로 정하고 발전시킨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 도서관 중에서 장서수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다음의 3위고, 학술 서양서에 한정해서는 앞의 두 곳을 앞선다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제목에 'Constantine'을 두고 찾은 결과가 단행본으로만 55개다. 콘스탄티누(노)스는 11명이지만, 책 제목에 쓸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은 이 1세와 [[콘스탄티노스 7세]], [[콘스탄티노스 11세]] 뿐인데, 7세는 [[로마노스 1세]]에게 오랫동안 눌려 지내서 황제로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제국 (중앙)행정론', '테마(지방행정)론', 제국 주변의 이민족에 대한 논의 등 저술로서 유명한 것이고, 11세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라 유명한 것이라서 절대다수는 1세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로서 여러 장점이 있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로마사 연구자 크리스 스카레의 말처럼 재능 있는 군사령관이면서도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될 유능한 선동가적 능력, 그리고 때론 비양심적이면서도 단호한 결단력을 갖추고 있으며, 행정가로도 적극적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결단을 내리던 황제였다. 즉, 상황에 따른 뛰어난 정치적 능력과 적극적이면서 현재와 미래를 두루 판단해 내린 행정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군사적 능력이 두루 있던 황제였다. 물론 콘스탄티누스는 고대 서양의 뛰어난 전술-전략가들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로스 3세]], [[한니발]]이나 [[스키피오]]처럼 천재적인 군사적 기질이나 후대인의 귀감이 될 만한 전략 전술을 쌓아 올리진 못했다. 그보다는 본인의 초인적인 개인 무력과 천재적인 지휘술, 최정예 병사들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파고들어 승부를 보는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게르만족]]을 처리할 때도 필요 이상으로 잔혹한 조치를 취했는데, 예컨데 부족장들을 잡아다 맹수들조차 살육에 지칠 정도로 격투장에 내던졌다거나, 강가에 [[경관|산더미처럼 쌓인]] 적의 시신을 그대로 놔둬서 주변 게르만 부족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Badass|게르만의 여러 부족장한테 미스테리적으로 큰 경외를 받은 바 있다.]] 또, 군사적인 스타일 자체가 지휘술과 본인 일신의 무력으로 전장의 승패를 결정짓는 타입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특별한 전술 없이 말도 안 되는 열세를 역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카이사르가 전술적인 부분에서 [[파르살루스 전투]] 하나로 불후의 명성을 쌓았듯이 콘스탄티누스도 이런 전투가 하나 정도는 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콘스탄티누스가 단순무식한 [[맹장]]이었으면 나올 수 없는 뛰어난 전술적 감각이 담겨 있었다. 이런 종류의 맹장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동시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불가사의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사를 보면 유명한 장군들이 일기토 등으로 일신의 무용을 뽐내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 제일 지명도가 높은 카이사르를 예로 들면, 그에 대한 여러 저술에서 전쟁/전투에 관한 것은 병참, 보급, 공성, 전투대형, 전술 등이 대부분이다. 그 다음 지명도 되는 스키피오, 폼페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콘스탄티누스 같은 맹장형 명장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공화정 시대 명장 [[마르켈루스]], 공화정 말부터 제정 초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 제정 시대의 [[대 드루수스]], 아그리콜라 등도 콘스탄티누스와 비슷한, 일신의 능력으로 흐름을 바꾸고 심리전 속에서 전황을 뒤집는 부분에서 상당히 뛰어난 명장이었다. 그리고 후대까지 포함하면 동로마 시기 [[이라클리오스]]가 비슷한 능력자라고 여겨진다. 이쪽은 아예 직접 일기토까지 한 기록이 있으며 아다나에서 적의 포위에 걸리자 직접 돌격하여 무쌍을 펼쳐 안전하게 군대를 퇴각시킨 기록까지 있다. 또한 지휘 스타일이 의외로 대 드루수스가 콘스탄티누스와 비슷했다. 그는 게르마니아 전쟁 중 적의 허를 찌르며 북해를 항해해 독일 북부로 상륙해 그대로 마그나 게르마니아 심장부까지 돌파했고, 콘스탄티누스처럼 말도 안 되는 열세 속에서도 포위를 일신의 무용과 용기 아래 뚫어내거나 심리전을 걸면서 상대를 제압하고 일순간 승기를 뒤집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대 드루수스는 사후에도 게르마니아 일대의 로마군 장병과 퇴역병 전우회에게 아이돌이자 군신 가까운 존재로 존경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독일 [[마인츠]]에는 로마군과 퇴역병 전우회가 세운 드루수스 스테인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곳은 콘스탄티누스 생전까지도 이 일대 사령관, 병사들이 매년 탑 주위를 돌면서 새해의 승리를 기렸다.] 콘스탄티누스 또한 공교롭게도 부제 시절 활약한 갈리아와 레누스 일대에서 명성을 드날린 바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같은 맹장형 명장들은 아무래도 로마사에서 그렇게 흔치는 않고 유명도도 떨어지기에, 없는 일화도 만들어서 콘스탄티누스를 찬양하기 바빴던 기독교인들마저 콘스탄티누스의 맹장 기질에 대해선 별로 찬양하지 않았고 다른 로마인들도 콘스탄티누스를 몹시 놀랍게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물론 콘스탄티누스가 아깝게 젊은 나이에 죽은 대 드루수스보다 군공과 극적인 일화가 앞서는 건 사실이다.[* 다만 인품 측면에서 보면 노예, 포로까지 친구로 여겨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한 대 드루수스와 비교하면, 콘스탄티누스가 대단히 흉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노예나 포로는 고사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에겐 친족이든 적이든 필요 이상으로 잔인성을 보였고 욱하는 기질도 다분했다. 사정없이 쳐죽인 게르만인들의 시체를 강변 주위에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묻지도 않으면서 썩게 내버려둬 죽은 자를 모욕하는 대단히 잔인한 이런 행태는 적어도 로마사에선 선례가 없었다. 아내인 파우스티나의 친오라비이자 선황의 친아들인 막센티우스에 대한 처사도 마찬가지다. 파우스티나와 크리스푸스도 콘스탄티누스 특유의 의외로 격정적인 이런 부분에 희생되었을 개연성이 적지 않다.][* 동양사에서 콘스탄티누스와 가장 성격과 지휘 스타일이 비슷한 항우를 연상케 하는 부분으로, 사실 상식적인 현대인 입장에선 그닥 가까이 하고 싶진 않을 인물이다. 다만 그것과는 별도로 적어도 콘스탄티누스의 부하들 외엔 당대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이런 어두운 부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정작 콘스탄티누스에게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게르만족들에겐 꽤 인기가 있었다. 이런 유의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자기 밑에 들어온 사람들은 게르만족이든 로마인이든 최대한 챙겨주기도 했으나, 역으로 콘스탄티누스처럼 잔인무도하면서도 교활한 인물이야말로 당대 게르만족이 이상형으로 삼던 두목감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황제의 진가는 쉽사리 따라할 수 없는 굳건한 조직력, 제국의 복잡한 행정을 여간하면 혼자서 감당한 책임감,[* 누군가는 지독한 권력욕으로도 폄하하지만. 마치 [[진시황]]과 명 [[홍무제]]가 하루에 서류 몇십kg 분량을 보고 결재했다는 것처럼.] 한 번 마음먹은 건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뚝심, 당장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면 그 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 그럼에도 전장에서는 몸을 내던져 적을 직접 격살하며 주변 장병들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능력 등에 있다. 이런 건 통치자로서 기본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기본이 다 되어 있는 통치자가 드문 것 또한 인류 역사의 현실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제국 개편을 끝까지 뚝심 있고 일관되게 밀어붙여 끝장을 보는 것도 콘스탄티누스가 아닌 다른 누구든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설령 군사와 정치, 종교 분야에서 콘스탄티누스보다 뛰어난 인물이 적지 않더라도, [[올라운더|저 분야들을 그럭저럭 문제없이 다 커버할 수 있었던 인물은 분명히 드물었다.]] [[파일:ERyNAdfW4AEmD9n.jpg]] 현재 그의 고향인 [[세르비아]] [[니슈]] (니시)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엄청 밀어주고 있으며 니시의 공항 이름도 니시 콘스탄티누스 대제 공항(Аеродром Константин Велики Ниш)이다. 또한 [[2013년]]에는 [[밀라노 칙령]] [[https://en.wikipedia.org/wiki/Celebration_of_1700_years_of_Edict_of_Milan_in_Ni%C5%A1|1700주년 행사도 열었다.]][* 보면 알겠지만 시 당국이나 기념사업회 정도의 행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은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어서 치른 '''세르비아 정부의 국가적인 공식행사였다.''' 비잔티움 제국을 여러 번 침략하고 파괴해 생명력을 갉아먹었던 중세의 [[세르비아 제국]]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